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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있을 때 왜 가장 창조적일까 [의사소통의 심리학]

2025-08-08 HaiPress

(13) 전혀 다른 ‘생각의 구조’를 가진 시인,박인환과 김수영

‘목마와 숙녀’라는 시를 외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이 시는 꼭 담배를 피우며 인상 쓰고 읊어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인 박인희가 분위기 있는 연주를 배경으로 낭송하며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이라는 구절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이가 들수록,인생이 참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꼭 이 시구가 떠오르곤 합니다.

20세기 후반,대한민국 문학에서 박인환을 이야기할 때면 꼭 비교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김수영입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회 참여를 둘러싸고 문인들이 진영을 나누던 시절에 박인환은 ‘순수문학’을,김수영은 ‘참여문학’을 각각 대표하던 시인이었습니다. 순수문학,혹은 참여문학이라는 개념은 일제강점기에도 있었지만 서로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박인환과 김수영을 ‘순수와 참여’의 대립으로 구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려고 합니다. ‘생각의 방식’의 대립으로 보고 싶습니다. 박인환은 그림으로 생각했고,김수영은 문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시구를 대비시켜 보면 바로 분명해집니다. 일단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시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도무지 헷갈립니다. ‘한 잔의 술’ ‘버지니아 울프’ ‘목마’와 ‘숙녀의 옷자락’이 어떤 논리적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저 뜬금없는 ‘그림의 연속’입니다. 시 전체가 그렇습니다. 반면 김수영의 시는 지극히 논리적입니다. 그의 유명한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한번 볼까요?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일상의 사소한 부조리함에는 그토록 분노하면서,권력의 폭력 앞에서는 침묵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고백하는 시입니다. 그 모순으로 인한 고통을 독자들에게 아주 논리적으로 설파합니다.

박인환은 그림으로 시를 썼고,김수영은 문장으로 시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완벽하게 다른 시를 쓴 겁니다. 박인환은 이미지 중심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를 했고,김수영은 언어 중심 ‘문장적 사고(verbal thinking)’를 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김수영은 MS-DOS식 사고를 하고,박인환은 MAC-OS적,혹은 윈도우적 사고를 했던 겁니다.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인간의 생각은 비논리적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행동경제학’은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해서 경제 현상을 설명합니다. 생각은 그림으로 날아갈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비선형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각적 사고는 생각의 한계를 자꾸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문장적 사고는 그러다 벌어진 일을 설명하고,검증하려 합니다. 정당화도 하지요. 한마디로 시각적 사고는 사고를 치고,문장적 사고는 뒷수습을 합니다! 창조는 시각적 사고가 합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마우스에서 인공지능(AI) 혁명까지의 과정을 훑어본 것입니다. 문명사를 바라보는 이 새로운 통찰을 문화심리학적 의사소통 이론으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시인 박인환(왼쪽)과 김수영(오른쪽). 1970년대 ‘순수문학 대 참여문학’ 논쟁의 각 진영을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차이는 문학 이념 차이가 아니었다. 생각의 구조에서 비롯된 차이였다. 박인환은 ‘시각적 사고’를 했고,김수영은 ‘문장적 사고’를 했다. 희한하게도 서양의 현인(賢人) 중에는 ‘맹인(盲人)’이 많습니다‘지혜로운 맹인(Der weise Blinde)’이라는 독일어 단어가 있습니다. 서구 신화,철학,문학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영어에도 ‘Blind Seer’나 ‘Blind Prophet’와 같은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시각을 잃으면 더 깊은 통찰,영적 지혜,언어적 진리 접근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겁니다. 서구 언어중심주의의 영향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는 양상이 많이 다릅니다.생각의 대부분은 그림,즉 ‘시각적 사고’입니다. 언어를 배우기 전,우리는 시각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머릿속에 ‘표상(representation)’합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이 표상 능력을 바탕으로 ‘즉각모방’-‘지연모방’-‘상징놀이’라는 창조의 과정이 가능해집니다. 문장적 사고는 이 같은 시각적 경험들이 축적된 후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와 관련해 심리학에서는 1970년대에 ‘이미지 논쟁(imagery debate)’이 있었습니다.논쟁은 1973년 캐나다의 웨스턴온타리오대 교수였던 심리학자 제논 월터 필리신이 ‘심리학 연보(Psychological Bulletin)’에 ‘What the mind’s eye tells the mind’s brain: A critique of mental imagery(마음속 눈과 사고 과정: 심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그림처럼 생각하는 것 같지만,실제로는 언어적 규칙과 지식을 활용해 시뮬레이션할 따름이라는 주장입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적,논리적 코드에 기반하기 때문에 시각적 사고를 독립된 사고 체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숱한 반론을 이끌어냈습니다.대표적인 반대 진영 학자가 하버드대 심리학과 스티븐 마이클 코슬린 교수입니다. 코슬린 교수는 피험자에게 서로 다른 각도로 회전된 3D 물체 이미지를 보여주고,두 물체가 동일한지 판단하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정신적 회전(Mental Rotation)’에 관한 실험입니다. 그 결과,물체의 회전 각도가 클수록 판단 시간이 비례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물체를 시각적으로 ‘회전시키며’ 비교하는 것을 뜻합니다.만약 필리신 교수의 주장처럼 인지 능력이 언어적 규칙에 기반한다면 각도 차이에 따른 반응 시간에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 물체는 다른 물체와 같다,아니다만 판단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실험 결과는 뇌 속에서 시각적 변환에 따른 ‘공간적 표상(spatial representation)’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오늘날,언어적 사고가 인간 사고의 본질이라는 가설은 폐기되었습니다. 시각적 사고와 언어적 사고는 대립하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뇌 영역과 정보 처리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긴밀히 상호작용하는 두 축으로 이해됩니다. 특히,시각적 사고는 창조적 발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언어적 사고는 이러한 시각적 사고가 개척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영역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주로 활용됩니다.AI 혁명을 가능케 한 기계학습,특히 언어 자료를 고차원의 벡터 공간에 위치시켜 패턴 인식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LLM(대규모 언어 모델)은 패턴 탐색 및 의미 구성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인간의 시각적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과정을 거칩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느닷없는 AI 혁명은 ‘시각적 사고의 21세기적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쉐퍼드(Shepard)와 메츨러(Metzler)가 발표한 논문(1971년)에 실린 ‘정신적 회전’ 실험에서 사용된 도형. 위-같은 모양이지만 종이 위에서 시계 방향이나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가운데-같은 모양이지만 앞뒤·위아래로 3차원 공간에서 돌려놓은 것,아래-거울에 비친 반대 모양으로 바뀌었고,동시에 앞뒤·위아래로 3차원에서 돌려놓은 것. 회전 각도가 클수록 같은 도형인지 판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각적으로 사고한다는 뜻이다. 멍하니 있을 때 가장 창조적입니다

우리는 멍하니 있을 때,가장 창조적입니다. 생각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창조적 사고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입니다. 생각이 자유롭게 날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창조적 생각은 바로 이때 일어납니다.

‘의식의 흐름’이란 개념을 처음 소개한 이는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입니다. 미국 심리학의 대표적 창시자였던 윌리엄 제임스는 1890년 발표한 그의 대표 저작인 ‘심리학의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에서 ‘인간 의식은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강물처럼 유기적으로 흐르는 심리적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생각,감정,감각,기억 등은 단선적,혹은 논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마치 강물처럼 서로 스며들고 합쳐지며,고정된 경계 없이 변화하고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은 100년 후에 논의되는 시각적 사고(visual thinking)의 작동 방식과도 사뭇 닮아 있습니다. 시각적 사고 또한 의식의 흐름처럼 순차적·논리적인 문장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이미지와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아이디어를 만들어냅니다.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개념이 나타난 후,문학과 예술 영역에서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세계적인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버지니아 울프,윌리엄 포크너 등은 내면의 감각,기억,이미지,감정이 비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내적 독백(stream of consciousness writing)’을 통해 기존의 문학 형식을 혁명적으로 바꿨습니다. 앞서 소개한 한국의 박인환도 이 흐름의 끝 무렵에 있는 것이지요.

이제까지 문학의 근본 형식이었던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문장적 사고의 기본 형식을 파괴한,시각적 사고의 적극적 활용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AI 용어로 비유하자면,인간 문명의 멀티모달리티(multi-modality)가 인위적으로 구현되며 이제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창조적 에디톨로지’가 시작된 거죠.

비슷한 시기,유럽에도 인간 의식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자유연상’이라는 개념이 나타났습니다. 시작은 심리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독일의 빌헬름 분트였습니다. 분트는 인간 심리를 설명하며,최초로 ‘연상(Assozi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사고와 감각은 연합 규칙에 따라 연결된다는 주장이었지요. 이 개념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지만요.

프로이트는 인간 의식의 기저에 엄청난 크기의 욕망과 충동의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이트는 그 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론으로 자유연상을 찾아냈습니다. 이후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자유연상 개념이 문화,예술의 창조적 작업에 미친 영향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혹은 자유연상은 시각적 사고의 특징입니다. 언어적 사고처럼 순차적 논리 구조가 아니라 이미지,기억이 비연속적·비선형적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오늘날 GPU를 이용한 인공지능의 데이터 병렬처리와 매우 유사합니다.

문장으로 생각하면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고가 문장적 사고로 전환되면 자유롭게 날아가던 생각은 멈추고 그림들 사이 벌어진 빈틈을 문장으로 메꾸려고 애쓰기 시작합니다. 이 같은 정당화(justification) 기능을 하는 문장적 사고의 증거를 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자기중심적 언어(egocentric speech)’에서 찾습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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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2호 (2025.08.13~08.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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